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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경제일보-김길호의 일본아리랑(142)]교토 미미쓰카 위령제 참가와 우토로 평화기념관 탐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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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댓글 0건 조회 127회 작성일 24-11-13 1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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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토 미미쓰카 위령비 참가와 우토로 평화기념관 탐방

"오전부터 오후에 이르기까지 큰비가 내리겠습니다. 그리고 천둥 주의보가 발령되었으니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규슈 미야자키현에서는 철 늦은 센죠코스이타이(線狀降水帶)라는 일부 지역의 집중호우로 인명 피해가 발생했으며, 오사카·교토를 중심으로 킨키지방은 폭우 비상이 걸렸다. 며칠 전부터 이러한 일기예보가 나왔었는데 10월 23일 당일 아침의 예보는 거의 결정적이었다.

전날, 22일에는 민단 오사카본부 김광자 생활부부장으로부터 이러한 상황 속에서 참가 여부에 대한 확인 전화를 신청자 모두에게 하면서 연락처 확인도 확보했다. 이렇게 불안한 날씨 속에 김명홍 민단 오사카부본부단장의 인솔하에 약 45명은 쿄토 미미쓰카(耳塚) 위령제 참석을 위해 민단 오사카본부 부근에 대기하던 버스를 타고 오전 8시 출발했다. 불안한 것은 날씨만이 아니라 참석자 모두의 마음에도 모락모락 피어나고 있었다.

오전 10시부터 '(사)겨레얼살리기국민운동본부'(이권재 이사장) 주최로 <제17회 겨레얼살리기 교토이비총 위령제>가 열렸다. 폭우에 대비해 제단까지 텐트를 치고 제를 지내다가 조금씩 내리던 비가 그치자 텐트를 도중에 철거해서 다시 진행했다. 10월 말, 늦가을에 들어선 날이지만 기온은 28도를 육박하고 있었다. 텐트 밖에 앉았던 참석자들은 배부한 위령제 팸플릿을 머리 위에 얹고 뜨거운 햇볕을 차단해야 했다.

빗나간 일기예보 오보(?)에 참석자들은 이 무덤에 묻힌 12만 6000명의 한이 응축된 결과라고 주고 받았는 데 12시에 위령제가 끝나고 돌아갈 때 한 차례 큰비가 쏟아져서 참석자들을 놀라게 했다. 위령제는 전형적인 유교 형식으로 진행되었는데 헌향에 이권재 이사장, 초헌(한국민족종교협의회 김령하 회장), 아헌(주오사카대한민국 진창수 총영사), 종헌(한국민단오사카부본부 김명홍 단장, 동 교토부민단 장상일 단장)이 맡았다. 헌다(獻茶)는 겨레얼살리기국민운동본부 윤도심 교토지부장이 제단에 올렸다.


염불은 정광 본문원 주지 자홍혜광 스님이 하였으며, 위령무는 교토 한국전통예술원 김일지 원장과 함께 6명이 출연했다. 위령무에서는 징을 갖고 나오기도 하고 음악도 흘러 나왔지만 무덤 주위에 있는 집들에 대한 소음 배려인지 소리가 작아서 아쉬움을 남기기도 했다.

위령무와 내빈 소개를 마치고 이권재 이사장은 인사말에서 정유재란 때 포로가 되어 일본 각지에서 유폐되었던 유학자 강항의 일본 압류기를 펴낸 <간양록: 看羊錄>을 소개했다. 그러면서 강항 선생이 쓴 '섭란사적: 涉亂事迹'에 의해서 비이총(鼻耳塚)의 실태가 밝혀진 내용을 말했다.

추도사는 진창수 총영사가, 최근 한일관계는 그 어느 때보다 우호적이지만 과거의 역사를 직시하고 바로 잡고자 하는 용기 또한 중요하다고 했다. 그러면서, 전쟁의 오래된 상흔을 간직한 이곳 이비총은 생생한 평화 교육의 현장으로서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 세대를 잇는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비총은 임진왜란 당시 토요토미 히데요시의 명령으로 한반도에서 우리 민족의 코를 베고 전리품으로 일본으로 갖고 왔다. 갖고 오는 도중에 부패 방지를 위해 소금과 술에 절이고 갖고 와서 미미쓰카에 묻힌 것은 약 12만 6000명의 코와 귀들이다. 처음에는 코무덤이라고 불리웠으나 토요토미 히데요시 후, 토쿠가와 이에야스 시대의 유학자 하야시 라잔이 코무덤이라면 너무 야만적이기 때문에 귀무덤이라고 쓰기 시작해서 오늘까지 사용하는데 일본어로는 '미미쓰카(耳塚)'이다.

토쿠가와 시대에는 이 무덤을 방치해서 조선통신사가 교토에 들렀을 때는 보이지 않게 막을 치고 가리기도 했지만 메이지 시대부터 보전에 힘을 기울였다. 미미쓰카는 1597년에 만들었는데 이 사실을 안 관할 지역인 <민단 교토 히가시야마지부>가 400년이 지난 1997년에 김동출 지단장을 중심으로 처음으로 위령제를 지냈다.

이날 위령제에는 전남 영광군 군남, 백수, 염산초등학교 5,6학년 어린이들 30여 명이 합동으로 교토에 수학 여행을 왔다가 위령제에 일부러 참석했다. 이 지역에 사는 88세의 동포 할아버지는 어린이들을 무덤 안으로 들어오라고 해서 같이 위령제를 지내야 하는데 밖에서 보게 하고 있어서 홀대한다고 나무랐다. 그러나 비가 올지도 모르고 또 무덤에 공간이라고는 위령무를 출 장소밖에 없는데, 그 배려에는 기뻤지만 조용히 제를 지내는데, 너무 고집을 피워서 필자들에게 말을 거니 좀 난감했었다.


필자는 그보다도 서울처럼 큰 대도시의 학교도 아니고 지방 도시의 3개 초등학교 (대도시 지방 도시라고 차별했다면 사과합니다.) 어린이들이 함께 가까운 곳이라고 하더라도, 외국인 일본에 수학여행을 왔다는 사실에 가슴 뭉클했다. 경제난으로 민생에 여러 어려움이 있다고 하지만 초등학교 어린이들이 외국까지 수학여행을 왔다는 것은 고국의 풍요스러움을 입증하는 산 증거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새로운 시각으로 오늘의 위령제를 제각기 마음에 새길 것이다.

12시에 위령제를 마치고 오사카에서 참석한 일행은 쿄토 우지시에서 점심을 먹고 오후 2시 30분에 우지시 이세다쵸에 있는 <우토로 평화기념관(관장 다가와 아키코) >을 방문했다. 수요일은 휴관일인 데 민단 오사카본부에서 간 우리 일행을 위해서 문을 열고 맞아주어서 송구스러우면서도 고마웠다.

김수환 부관장이 '우토로평화기념관'이 2022년 4월 개관하기까지의 과정을 자세히 설명하고 나서, 2층에 전시된 전시물까지 자세히 안내해 주었다. 그 본질적인 원점에는 인권 문제가 기본적으로 존재하고 있다는 역설에는 빛나는 설득력이 있었다. 우토로평화기념관은 일제시대에 비행장 건설을 위해서 모인 조선인이 살아온 우토로마을의 역사를 알리고 평화를 염원하기 위해서 만든 기념관이었다.


우토로마을은 1941년 교토비행장 건설에 재일동포가 노동을 하면서 형성된 취락지였다. 무허가 마을이어서 토지 소유주인 일본 기업이 1989년 주민들의 퇴거를 요구하며 소송을 제기해 거주권을 잃을 위기에 처하기도 했다. 2004년에는 토지 매입자가 강제 철거를 주장하면서 세상에 알려졌다. 주민들이 소송에 지면서 삶의 터전을 빼앗길 위기에 처하자 1989년 일본의 양심 세력을 중심으로 우토로를 지키는 모임이 결성되었다.

이 소식은 한국에도 알려져 '우토로국제대책회의'가 만들어졌다. 그후, 일본인과 한국 시민 단체 등의 성금과 2007년 한국 정부의 지원금으로 토지를 구입했고, 주민 재입주 보장을 전제로 일본 정부의 재개발이 추진돼 2018년 1기 시영 주택 완공으로 일부 주민이 입주하고 2기 시영 주택도 준공되어서 모두 입주하게 되었다.

기념관 방문자는 처음 예상은 연간 2000명을 목표로 설정했지만 예상 이외의 방문으로 개관 1주년에 1만 3000명, 2주년에는 2만 3000명의 내관이 있었다고 한다. 각 단체의 방문은 물론 기업의 인권 교육의 현장으로서 방문하여 연수를 실시하는 예도 있다고 했다. 이곳에서 봉사활동을 하고 있는 재일 3세인 신유리코 씨가 주변을 돌면서 지역의 과거를 설명하고 2동의 시영 주택을 안내해 주었는데 아담한 건물이었다.


45명의 일행 전부를 2층 전시회를 동시에 안내할 수 없어서 2개반으로 나눠서 각각 전시실과 기념관 주변을 돌아보았다. 2반이 주변을 돌아보고 기념관으로 돌아오니 4시 30분이었다. 예정대로 기념관을 나와 버스를 타는데 갑자기 큰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낮에 위령제 때도 그랬는데 평화기념관에서도 모두 마쳤을 때 바로 큰비가 내렸다.

우토로마을의 동포 주민이 생활 기본의 상징인 수돗물도 없는 인프라 생활 속에서도 좌절하지 않고 살아온 그 인내와 자립정신에 숙연하지 않을 수 없었다. 김수환 부관장의 한 마디 한 마디에 일행 모두가 자신들의 부모, 혹은 조부모 시대에도 그랬었다고 과거형이었던 일들이, 이곳 우토로마을에서는 최근까지도 현실로서 존재하고 있었다는 사실에 놀랐다.

가을비 속에서 고즈넉한 저녁 마을 길을 대형 버스가 좁은 골목길을 돌다가 길의 대각선 상태 속에서 진퇴양난에 빠져버렸다. 기사 아저씨가 차를 세우고 개인 집 앞에 있는 오토바이와 어린이 자전거를 치우고 가까스로 그 골목길을 빠져나올 수 있었다. 그 운전 솜씨에 버스 안에서 박수 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렇다. 그 박수 소리는 날씨도 불안 속에서 위태로웠는데 고비마다 잘 넘겼고, 후손들인 우리의 위령제 참배, 우토로마을 동포들이 어려운 고비를 넘기고 오늘을 이뤄낸 숭고한 정신, 그 순례지를 무사히 마친 우리 일행들의 경건한 마음의 울림처럼 느껴졌다. 끝으로 이 기획을 추진한 민단 오사카본부에 이 글을 쓰면서 감사 마음을 드리고 싶다.

출처 : 제주경제일보(http://www.jejukyeongj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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